[칼럼 - 한정찬] (시) 삶에 고인 언어들 4

[한국공공정책신문=김유리 기자] 시인 한정찬의 "삶에 고인 언어들 4"


 

1. 전원풍경

 


온종일 농장에서

농부는 하루를 접을 때까지

굳은 손바닥에 흙을 남긴다.

 

지나가는 사람들은

노동의 신성한 가치,

땀의 무게를 모르고

바람처럼 입이 가볍다.

 

농장 가장자리,

포도나무 넝쿨이 마를 때

매미들 울음도 떨어져

길손의 손등에

햇살로 내려앉는다.

 

아하, 투명한

은빛 날개,

매미들의

울음이

소멸의 소리로 들린다.

  

 

2. 바람 스치고 간 자리에

  

바람이 불어오면

나무는 잠시 흔들리지만

그 떨림 속에서

스스로 더 깊이 이해한다.

 

흙 속의 뿌리는

보이지 않는 곳에서

더 단단히 서로를 감싸며

흔들림을 버틸 힘을 키운다.

 

세상이 흔들어 놓는 순간마다

나무는

더 꼿꼿이 사는 법을 배운다.

쓰러질 듯 흔들릴수록

곧은 꿈은 더욱 선명해진다.

 

시련이 다가오면

우리도 나무처럼

잠시 흔들리고

잠시 아파하지만

 

그 틈에서

마음의 결은 더 야무져지고

생각의 뿌리는 더 깊게 내려

또 하나의 지탱하는 힘이 된다.

 

비바람이 몰아치는 날

우리는 비로소 깨닫는다.

약한 줄만 알았던 마음이

얼마나 강한지,

멀리 날아간 줄 알았던 희망이

얼마나 가까이 있는 줄을.

 

상처도, 눈물도

바람이 남긴 흔적일 뿐

그 자리를 지나온 우리는

어제보다 더 강하고

오늘보다 더 빛나는 내일을 향한다.

 

그래서 다시 바람이 분다고 해도

우리는 안다.

흔들릴지언정

쓰러지지 않는 나무처럼

한 걸음 더 단단해질 것임을.

 

 

 

3. 기원

  

산하처럼

높고 넓고 푸르게

당신의 마음이 펼쳐지길.

 

영원한 사랑으로

시간의 강을 건너

서로를 비추며 함께 걷길.

 

오복이 깃든 하루하루

웃음과 따스한 온기가

늘 가득하길 기원한다.

 

 

 

4. 봄노래

  

봄바람은

나뭇가지에 살포시 걸려

햇살 따라 흔들린다.

 

봄소식은

물 위에 반짝이며

졸졸 흐르는 노래가 된다.

 

봄 향기는

보드라운 풀밭 위에 내려

살며시 손등을 스친다.

 

어느새

내 마음에도

봄 하나 피어오르는

봄노래가 들린다.

 

 

 

5. 김장 채소

  

찬 기후를

멍에처럼 지고

싸늘한 바람 속에서

서서히 자란다.

 

단단한 육질,

손끝에 전해오는

내공의 무게

묵직한 느낌이다.

 

그 포기마다

으뜸의 계절이

녹아들어 익어왔다.

 

맛 일품의 시간이

곰삭아

천천히 발아한다.

 

 

 

6. 옛집에서

  

아침 안개 속

옛집은 잠에서 덜 깬다.

 

나는 새벽에 일어나

공기를 마시며

낙엽송을 본다.

 

잎끝에 남아 있던 이슬이

말없이 떨어지고

마당은 잠시 빛난다.

 

낙엽송은

버린다는 일에

아무 설명을 하려 하지 않는다.

 

서늘한 바람이 지나가며

버들가지를 흔든다.

나도 그만큼만 흔들린다.

 

 

 

7. 살아간다는 일

  

물결이 솟았다.

아무 일 없다는 듯 가라앉고

웃음이 스쳤다가

슬픔이 자리를 차지한다.

 

희망은 잠깐 빛나고

절망은 바닥까지 내려앉는다.

 

살아간다는 일,

쉽게 건너갈 수 있는 구간은 없고

흩어졌다가

또다시 모이는 구름이다.

 

세상은 그렇게

사람을 이끌고 간다.

 

 

 

8. 봄날

  

강 둔치에

푸른 기척이 먼저 일어나고

물 가장자리로

송사리들이 은빛을 흩뿌리며

동심원처럼 물장구치고 있다.

고라니들은 둔치 가장자리에 나와

조심스레 풀 뜯다 물을 마신다.

 

황사가 물러난 하늘은

투명한 언어처럼 맑고

금빛 햇살은

이른 봄의 이력을

다시 써 내려간다.

 

나는 오늘이라는 봄을

그림으로 남기려

붓을 들었다가

생각 속으로 더 깊이 젖어 든다.

 

마침내

붓을 내려놓고

구름의 끝을 바라본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 이 시간이

가장 또렷해진다.

 

 

 

9. 겨울이 오면

  

겨울이 오면

바람은 이유 없이

차가운 코를 찌른다.

 

오래 만나지 못한

그리운 얼굴들이

눈발처럼 빗금치고

지키지 못한 약속은

장갑 속에서

천천히 식어간다.

 

아무 말 없이

생각만 깊어지는 오후

잎을 모두 떨군 나무는

아직 말하지 않은 꿈을

마음속에 감추고

개울은 얼어붙은 채로

낮은 음표를 연습한다.

 

모두가 멈춰

봄의 기운을 기다리고

침묵으로 웃음이

도착할 편지처럼

내내 기다려진다.

 

 

 

10. 생강 같은 삶

  

울퉁불퉁한 것을

땅에서 캐낸다.

 

손에 묻은

흙과 침묵의 계절이

물속에서 풀린다.

 

깎일수록

향이 많아지는 삶.

매운 생강처럼

자기를 남기는 법.

건강을 위해

자라고 사라지는 것.

 

생강처럼

사는 일.

그런 삶이

문득

그리워진다.

 

 

 

11. 낚시꾼

  

삶의 추를 던진다.

물속으로, 망설임 없이

입에 닿는 것은

기다림의 무게다.

 

밑밥을 흩뿌리며

눈먼 욕망을 부르지만

어느 순간

나는 낚는 자도

낚이는 자도 아니다.

 

춥고 더운 계절은

수면 아래서 그 의미를 잊고

사계는 몰입으로

한 줄의 흔들림이 된다.

 

물이 세상이고

물이 이상이다.

나는 오늘도

밑밥처럼 매달려있다.



▲한정찬/한국공공정책신문 칼럼니스트 ⓒ한국공공정책신문

 

한정찬

□ 월간 소방문학회 대표, (사)한국문인협회원, (사)국제펜한국본부회원, 한국시조시인협회원 외

□ 시집 ‘한 줄기 바람(1988)외 29권, 시전집 2권, 시선집 1권, 소방안전칼럼집 1권’ 외

□ 농촌문학상, 옥로문학상, 충남펜문학상, 충남문학대상, 충남문학발전대상, 소방문학대상, 소방문화상, 충청남도문화상 외


작성 2025.12.22 10:30 수정 2025.12.22 10: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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